1994 queen

나의음악 나의조국 일본 오페라계의 새별,

유일한 재일동포 프리마돈나 전월선

<노래를 통해 두개의 조국 잇고 싶었습니다>

지난달 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오페라단의 <카르멘>의주역을 맡음으로써 처음으로 고국의무대에 선

재일동포 성악가 전월선씨

그녀는 현재 일본 니기카이 오페라단에서 활동하고있는 유일한 재일동포 성악가이다

지금은 한국국적을 가지고있지만 85년에는 조선국적으로 평양에서 노래를 부른바있는 그녀는 스스로 분단현실의 피해자이면서도 노래를 통해 남북한을 잇고싶어하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있다

 재일동포 성악가. 전월선 마침내 그녀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한국의무대에 섰다.

정열과 사랑의 화신이자 비운의 여인 ,카르멘,이 되어.1994 107일이었다 .

이제 이날은 전월선써에게는 잊을수 없는 날이 되었다.

한국오페라단 주최로 에술의 전당에서 열린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역을 맡아 열연한 전월선씨.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특유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화려한춤솜씨로 수많은 고국의 관객들을 열광케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박수소리의 물결과 성원이 강당을 뒤흔들었다.

그토록 감격에 겨운 무대는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지난85년 평양에서 노래했던때도 이토록 가슴이 터질 듯하지않았는데.한마디로감개무량,그자체였어요.

이국땅에 태어나 오페라가수가 된 그녀가 난생처음으로 밟은(그녀의표현대로),또하나의조국,에서그것도그녀가 가장자신있어 하는 카르멘의 주역을 맡았기 때문일까.

그 감격은 비로소 어머니 .아버지의고향이 있는 자신의 나라에 찾아와 자신의노래를 불렀다는기쁨.바로 그것이있어요.일본에서활동하면서 언제나 한국의 오페라 무대에 서고싶다는 꿈을 간직하고있었는데...이번에바로그꿈이 이루어져 더 없이 기쁩니다. "

자그마한 키 .큰 눈.야무진 입매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동양미인인 전씨의 한국무대 출연은 사실그녀 자신의 감격 이상의 적잖은 뜻이 담겨있다.

교섭단계부터 출연까지 계속해서 국내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엿다.

분단으로 나누어진 남과 북의 무대를 일본에서 활동중인 유일한 성악가인 그녀가 노래로 이었다 는점이 가장 큰 뜻일 게다 .

보통 재일동포 옴악인들은 조총련계일 경우 북한에서, 민단일 경우 남한에서 공연을 가졌다.

전월선써도 85 ,평양축전-새계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해 펑양문화회관 에서 독창무대를펼친바있다. 당시 조선국적을 지녔던 그녀는 김일성주석 앞애서 우리가곡을 불렀다.

사실 한국오페라단의 전씨 출연 교섭은 지난 90년부터 시작됐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그녀는 줄곧 한국오페라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써가 조총련계였기떼문애 어려움이 따랐다. 미루어질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국공연에 강한 의지를 지닌 전써가 93 1월 민단으로'전향'한끝에 마침내 그녀의서울공연이 가능하개 된 것이다.

제가 조총련계에서 민단쪽으로 옮긴것을 두고 자꾸 사람들이 전향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그런느낌이 전혀없어요. 하나의 민족이기에 저에게는 북조선뿐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조국이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북조선과 한국에서의 출연.국적문제, 모두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입장에서 취한 행동일뿐입니다"

이렇듯 그녀는 자신이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것을 정치사상적전향과는 성격이다른것임을 굳이 강조한다.

단지 한국인으로서 남과북의 무대에 모두서고싶다는 소박한 회망과 더 넓은무대영역을 갖고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조선국적이 예술활동을 하는데 상당히 불편했어요 86년 이탈리아유학과 러시아나 중국을 뺀 해외공연의 좌절, 모두 그 때문이었죠. 게다가 북한은 정치색이짙은 가곡은 있지만 오페라가 없어요.

 

 

미성과스타기질로 일본 오페라계를 뒤흔들어

 

예술의 전당에서 오른 서울공연으로 분단된 남북한무대에 동시에선 최초의 오페라가수가 된 전월선씨.

그녀는현재 일본에서 활동중인 유일한 재일동포 성악가이기고하다.  니기카이오페라단 소속의 일급프리마돈나인 것이다. 니기카이 오페라단은 후지와라오페라단과 더볼어 일본오페라계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최정상급오페라단이다.

 851월 일본동경에서 프랑크의 1인오페라,(),과 라벨의 오페라,스페인의 시,를 통해 데뷔한 그녀는같은해 니기카이 오페라단에 입단했다.

그뒤 ,살로메,,나비부인,,세빌리아의 이발사등 여러 오페라의 주연으로 활약했으며 콘서트와 리사이틀을개최하기도했다.

 

,미성(美聲)과 함께 무대에서 빛나는 그의 스타기질은 일븐오페라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킬것이다,

,작은체구임에도 무대위애 서면 이상하리만큼 위엄이 드러난다. 성량은퐁부하며 음정 또한 정확하다.

대단히 드라마틱한목소리이다.

,뛰어난연기력과 가창력, 강한 개성이 돋보인다.

그녀에 관한 이사히 신문을 비롯한 일본언론의평이다.

사실  전월선씨는 83년에 리사이틀로 이미 약식데뷔를 한바있다.  2회연속으로 가진 그해리사이틀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의 오페라아리아와 한국가곡을 선보였다.

특히 남북의 가곡을 레퍼토리로 하는 리사이틀을 가끔 열어 재일한국인들의 열렬한 사랑을받았다 .

,한국대중가수로는 조용필과 패티김을 좋아하며 가끔 한국가요중 사랑해, 이별, 타향살이를 즐겨 부른다는

전월선씨.물가에  핀 수선화애 달빛이 비쳐드는 어머니의 테몽때문애.윌선(月仙),이라는이름을 얻개됐다는 그녀는 1959 년동경에서 22녀중 차녀로 태어났다 .


혜방전후 일본으로 건너갔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본에서 만나 결혼했지만 우연하게도 모두 진주출신이라고한다.

어렸을때부터 피아노와 무용에 재능을보였고 연극 무용 시낭송등으로 학예회무대에 오를 기회가 잦았다.

,,조층련계학교인 민족학교 다니던 중3때 내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지요.

당시 한국의 민속무용도배우고있었던 때라 좀더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하고싶었어요.

 경제적으로도 곤란했고 조선인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르겠지만 정식으로 일본음대에 들어가 음악을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씨는 고등학교 시절 일본인 친구들보다 두배이상으로 공부에 열중했다고한다.

 마침내 그녀는 일본음대의 명문인 도호음악대에 재일한국        인으로서 처음 합격하는 영예를 안는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운도 많이따랐어요 그때 피아노는같은 수준의 합격자가많이있었지만 성악부문에서는 제가 실기시험에서 톱이었어요.

음대시절 주위의 권유도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연극 무용등을 해온터라 오페라에 메력을느껴 오페라 가수가되었습니다,,,

 

고향에 들러 성묘도하고 천척들도 만나

 

전씨는 재일한국인으로서 차별대우를 받은 적이없냐는몰음에 '따지고보면 전혀 없는것은 아니나 오히려 자신에게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플러스 요인으로 많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속의 유일한 한국 음악인이기에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신을 끊임없이 연마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일본오페라계예 새별로 우뚝선 메력적인 재일한국인 '카르맨'전월선씨 처음의 고국방문임에도 바쁜일정 때문에 아쉽게도남산' 이태원' 경복궁 등 몇군테 밖에 들러보지 못했다는 그녀는 7일공연 뒤 다음날 진주로 향했다.

  진주. 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땅을 밟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곳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한 뒤 친척들도 만났다.

  일본에서 한번 만난적이있는 작은할아버지가 유일하게 낯익은분.고모를비롯 모두가 낮선얼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 또한 한국공연만큼이나 뭉클할수밖에 없었다.

그 무클함 뒤편에는말 못할 사연도 없잖다.

바로 이번 한국방문에 동행한 어머님과 관련된 일이다.

전씨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머니 또한 첫 한국방문이지만 아무래도 조심하지않을수밖에없다.

북한에 아직 복송 가족을 둔 어머님이기에 자칫 어머니의 한국방문이 북에 있는 가족들에계 나쁜영향을끼칠지도 모를 일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전써는 어머니와의 동행사실을 쉬쉬할수밖에 없었다.

고향땅에 와서도 마음껏 기꺼워할수없는 어머니. 전씨는 어머니같은 수많은사람돌, 아니 아직도 고향땅조차 밟아보지도 못한 동포들이 수없이많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작은 공연이 이런동포들에게 작은 위안이 된다면 더없이 기쁠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기도한다.  전월선씨는 자신의 ,남북무대 동시출연이 민족의 동질성 회복은 믈론 남북통일을 위한 밑거름이라도 될 수있다,는 희망을 품고 더욱 열심히 노래를 부를것이라고 말했다.

,,남쪽도 북쪽도 나에겐 다같은 조국입니다"오페라에 빠져 아직 결흔을 못했다는그녀의 야무진 말이다.